1518년 7월, 슈트라스부르의 의사들은 북과 피리를 치우라고 했다.
치터와 비올과 류트는 괜찮다고 했다. 작은 오르간도 좋다고 했다. 포도주는 금하고, 보리 달인 물과 보리빵과 귀리보리죽을 권했다. 이 목록은 도시가 주교에게 보낸 답신에 처방으로 함께 적혀 있다.
그해 여름 그 도시에서는 사람들이 멈추지 못하고 춤을 추고 있었다.
01이례적인 병에 관하여
그해에 쓰인 종이 가운데 지금까지 확인된 것은 몇 장 되지 않는다. 그 몇 장이 이 이야기의 바닥이다.
7월 23일, 시참사회가 춤춘 아이들의 부모를 불러 심문했다. 심의록에는 환자를 성 비투스에게 보낸다는 언급이 있다. 이 한 줄은 조용하지만 그림 하나를 무너뜨린다. 아이가 있었다면 부모가 있었고, 시가 그 부모를 불러 세울 수 있었다면 행정은 이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적어도 이 기록 안에서 춤춘 사람들은 광장에 몰려든 익명의 무리가 아니다.
이틀 뒤인 7월 25일, 시는 주교 빌헬름의 문의에 답신을 보냈다. 문서는 이 사태를 「이 이례적인 병」이라고 부른다. 한 여자에게서 시작되었고 그 뒤 다른 사람들이 춤추기 시작했다고 적었다. 시는 이들을 며칠 붙잡아 두고 의사들에게 물었다. 그리고 「어쨌든 그것은 끝나가고 있다」고 썼다.
끝나가고 있지 않았다. 8월 초에 시는 공개 무도를 금지했다. 벌금은 30실링, 기한은 9월 29일 성 미카엘 축일까지였다. 포고령에는 단서가 붙었다. 명예로운 자가 혼례나 초미사를 자기 집에서 축하할 때는 현악기로는 가하나, 탬버린과 북은 양심에 걸어 쓰지 말 것. 날짜는 자료에 따라 8월 2일과 3일로 갈린다.
그리고 8월 11일, 참사회는 병이 다시 나타났다고 적었다.
01이 절의 근거자료 8
- 1518년 7월 23일 시참사회가 춤춘 아이들의 부모를 불러 심문하고 환자를 성 비투스에게 보낸다고 적은 심의록: 슈트라스부르 시립문서고 AMS III 200/15. 2018년 전시 연계 교사용 자료집에 사료 발췌와 청구기호가 실려 있다. 문서고 원본은 열지 못해 자료집의 발췌 범위 안에서만 썼다
- 확인된 당해 문서의 범위: 청구기호까지 확인된 1518년 문서는 7월 23일 심의록, 7월 25일 답신, 8월 초 금지령, 8월 11일 재발 기록이다. 문서고 전체 소장 목록은 열람하지 못했으므로, 본문의 「지금까지 확인된 것은 몇 장」은 확인된 집합을 가리키지 그해에 쓰인 관련 기록 전체를 가리키지 않는다
- 부모 소환 기록에서 읽을 수 있는 것: 발췌가 보여 주는 것은 부모를 불러 심문했다는 데까지다. 환자의 이름이나 주소가 기재됐다는 근거도, 시민 신분을 확정하는 근거도 없다. 본문을 「행정은 이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와 「이 기록 안에서 익명의 무리가 아니다」로 좁힌 이유다
- 7월 25일 시가 주교 빌헬름에게 보낸 답신과 「이 이례적인 병에 관하여(der ungewönlichen kranckheit halb)」라는 표현, 「한 여자에게서 시작되었다」, 「어쨌든 그것은 끝나가고 있다」: 바랭 도립문서고 ADBR 12J 1495. DHIAlsace, 「Danse de Saint-Guy」 (Élisabeth Clementz, BNU Strasbourg)에 프랑스어 해설과 독일어 인용구가 함께 실려 있다
- 한 여자에게서 시작해 수십, 수백으로 번졌다는 골격이 심사 지면에서도 같게 서술된다는 점: Lynneth Miller Renberg, "The 1518 Dancing Plague in Strasbourg: From Miracles to Medicine", 『Routledge Encyclopedia of the Renaissance World』 (2026), doi:10.4324/9780367347093-rerw266-1 — 「It started with a single woman and soon spread to dozens, then hundreds, of people.」 문서고 원문 대신 확인한 심사 근거다
- 8월 초 공개 무도 금지 포고령, 벌금 30실링, 9월 29일까지, 혼례·초미사의 현악기 예외와 탬버린·북 금지: 슈트라스부르 시립문서고 R3, fol. 72r로 표기된 자료 / 2018년 전시 보도자료. 날짜가 8월 2일과 3일로 갈려 본문에서 하루를 특정하지 않았다. 벌금액과 기한은 단일 계열 자료에 기댄 값이다
- 시 당국의 대응이 금지·의료·순례를 함께 포함했다는 점: Miller Renberg (2026) — 「hiring musicians and then banning music, hospitalizing dancers, and issuing numerous civic orders meant to limit the contagion.」
- 8월 11일 병이 다시 나타났다는 참사회 포고: DHIAlsace / Rue89 Strasbourg의 Clementz 인터뷰. 재인용 상태다
02그해의 성좌와 계절의 더위
주교에게 보낸 그 답신에는 의사들의 소견이 함께 실려 있다. 무엇이 원인이냐는 물음에 그들은 이렇게 답했다. 올해의 성좌 배치와 계절의 더위에서 온 자연적 질병이다.
이 소견은 근대 과학처럼 들리지만 절반만 그렇다. 그들이 말한 자연은 별자리를 포함하는 자연이었다. 자연적 원인이라는 말과 성좌라는 말이 한 문장 안에 아무 마찰 없이 들어앉아 있다.
그래서 처방도 그 세계 안에서 나왔다. 포도주를 끊고 보리를 먹인다. 음악은 종류를 골라서 들려준다. 치터와 비올과 류트와 포지티브 오르간은 가하고, 팀파니와 피리는 불가하다. 몸이 리듬에 끌려간다고 보았으니, 끌어당기는 리듬을 치우고 끌어당기지 않는 리듬만 남긴 것이다. 소리를 약으로 처방하면서 동시에 독으로 취급했다.
같은 도시가 같은 여름에 환자들을 성 비투스에게 보냈다. 자베른 위쪽의 성소였다. 원사료는 그곳을 「로텐슈타인」이라 적었고 후대 편집자가 「홀렌슈타인」으로 고쳤다.
의학과 신앙 가운데 무엇을 골랐느냐고 물으면 이 도시는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고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의사에게 묻고, 식단을 바꾸고, 악기를 고르고, 성소로 보내고, 춤을 금지했다. 다섯 가지가 같은 행정 체계 안에서 나란히 시행됐고, 이것들이 서로 모순이라고 적어 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02이 절의 근거자료 9
- 의사들이 「올해의 성좌 배치(diß jars constellation)와 계절의 더위로 인한 자연적 질병」이라고 답한 대목: ADBR 12J 1495, 위와 같음
- 포도주 금지, 보리 달인 물·보리빵·귀리보리죽 처방, 치터·비올·류트·포지티브 오르간 허용과 팀파니·피리 금지: ADBR 12J 1495, 위와 같음 / 교사용 자료집에도 같은 문장이 인용된다. 이 악기 선별 처방을 재서술하는 심사 문헌은 확인되지 않았다 — 이 회차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이 가장 얇게 서 있다
- 1518년 대응의 초기 전제가 신벌이 아니라 질병이었다는 점: Miller Renberg (2026) — 「In 1518 Strasbourg, however, the initial assumption was not of divine judgment but of a disease outbreak similar to other sorts of plague.」
- 환자를 자베른 위쪽 성 비투스 성소로 보낸 사실: AMS III 200/15 / 교사용 자료집 / Heidi Zmick, "Dance Mania and Healing Networks in Sixteenth-Century Strasbourg" (University of Virginia, 2026), doi:10.18130/x460-4h89 — 시 당국(Magistrat)이 무용수들을 인근 성 비투스 성소 순례로 보냈다는 서술. 원사료의 「Rotenstein」을 후대 편집자가 「Hohlenstein」으로 교정한 점은 교사용 자료집의 편집자 주
- 다섯 조치의 병존: 의학·식이·악기 통제·순례·금지가 같은 행정 체계 안에서 함께 시행됐다는 점은 위 자료들이 지지한다. 그러나 당대 사람들이 이것을 모순으로 느꼈는지 아닌지는 자료가 말하지 않는다. 본문을 「모순이라고 적어 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로 쓴 이유다
- 세바스티안 브란트가 금융업자를 저주하며 쓴 시구 「Das ist die ordnung der vinantz. / Gott gebe inen allen sanct Vix tantz」와 청구기호 AMS 6R n° 38a, f° 11r-v: DHIAlsace. 「Daß dich der St. Veitstanz ankäme」라는 저주가 흔했다는 빈도 서술은 이 항목의 재인용이며 별도로 확인되지 않아 본문을 「전한다」로 열었다
- 성 비투스의 춤이 「성인이 내린 저주」로 여겨졌다는 배경: Thiago Cardoso Vale & Francisco Cardoso, "Chorea: A Journey through History", 『Tremor and Other Hyperkinetic Movements』 (2015), PMID 26056609 — 「initially considered a curse sent by a saint」 / Douglas J. Lanska, "The Dancing Manias: Psychogenic Illness as a Social Phenomenon", 『Frontiers of Neurology and Neuroscience』 (2017), doi:10.1159/000475719 — 「an ordeal sent by a saint, or a punishment from God」
- 브란트가 무도 금지 포고령의 서명자 가운데 하나였다는 서술: 2018년 전시 보도자료. 심사 문헌으로 확인되지 않아 본문에 전시 자료의 서술임을 밝혔다
- 성인의 이름이 병명이 된 경로와 시드넘의 자리: Vale & Cardoso (2015) — 「was named "Saint Vitus's dance" because afflicted individuals were cured if they touched churches storing Saint Vitus's relics… In the 17th century, Thomas Sydenham provided an accurate description of what he termed chorea minor.」 시드넘이 1686년 『Schedula Monitoria』에서 그 이름을 자기가 기술한 병에 붙인 점도 같은 계열의 명명사 서술이 확인한다. 이름을 만든 사람(파라켈수스)과 옮긴 사람(시드넘)이 다르다 — 본문이 둘을 나눠 적은 이유다. 시드넘 무도병이 소아 급성 무도병의 가장 흔한 원인이라는 점은 Lori C. Jordan & Harvey S. Singer, "Chorea in Children" (2005) / MedLink Neurology, "Sydenham chorea". 역사적 집단 춤 사건과 현대 신경학의 chorea를 같은 질환으로 잇지 않았다
03그 종이에 없는 것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확인된 당해의 종이가 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목록이 짧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아는 이야기의 거의 모든 장면이 이 안에 없다는 것이다.
400이라는 숫자가 없다. 사망자가 없다. 사망자 수가 아니라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 자체가 없다. 곡물시장에 세운 무대가 없다. 고용된 악사가 없다. 붉은 신발이 없다. 그리고 「트로페아 부인」이라는 이름이 없다. 문서는 「한 여자」라고만 적었다.

FIG. 011518년의 그림이 아니다
1564년 브뤼셀 근교 몰렌베이크의 간질 환자 순례를 그린 것이다. 1518년 슈트라스부르를 그린 기록화가 아니다. 이 사건의 동시대 도상은 확인되지 않았고, 대표 이미지가 다른 사건의 그림이라는 사실 자체가 이 절이 말하는 것과 같다.
찾은 것〈Pelgrimage naar Molenbeek〉 1569년 소묘 · 브뤼헐 1세의 1564년 구상에 의거한 익명작 · Rijksmuseum RP-T-1892-A-2489 · Public Domain
| 항목 | 사건 당해의 종이 | 뒤에 도착한 종이 | 오늘 도는 이야기 |
|---|---|---|---|
| 첫 인물 | 한 여자 (7월 25일 답신) | 이름과 동기가 붙는다 (1530년대·파라켈수스) | 트로페아 부인 |
| 규모 | 7월 중순 약 50명 (브란트 연대기) | 동시에 100명 이상 (1580년경·슈페클린) / 400명 (임린 가문 연대기) | 400명 |
| 죽음 | 언급 없음 | 많은 이가 춤추다 죽었다 (슈페클린) / 병명과 죽음이 한 문장에 (1636·골트마이어) | 최성기에 하루 15명 |
| 장소 | 붙잡아 두고 관찰 | 곡물시장과 말시장의 무대 (슈페클린) | 곡물시장의 무대 |
| 음악 | 북과 피리 금지 (7월 25일·8월 초) | 북과 피리 연주자 고용 (슈페클린) | 북과 피리로 더 격렬하게 |
표 읽기표는 가로로 읽는다. 오른쪽으로 갈수록 늦게 쓰인 종이다. 가운뎃칸은 한 시점이 아니라 반세기에 걸쳐 도착한 여러 종이여서 괄호에 누구의 종이인지 적었다. 첫 칸에는 행정문서와 동시대 행정관의 연대기가 함께 들어 있다. 마지막 줄에서는 음악의 방향이 뒤집힌다 — 금지에서 고용으로.
숫자도 같은 식으로 자란다. 동시대 행정관이던 브란트의 연대기는 7월 중순의 규모를 약 50명으로 적는다. 400이라는 값은 임린 가문의 연대기에서 나오는데, 같은 자료를 두고 4주째에 200명이 넘었다고 읽는 학자도 있다. 이 사건을 가장 널리 알린 역사가 존 월러조차 400을 쓸 때 「한 연대기 작가가 주장하기를」이라는 단서를 앞에 붙였다. 대량 매장지나 인골 증거를 지목한 조사는 이 글이 찾지 못했다.
숫자 하나는 아예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최성기에 하루 열다섯 명이 죽었다」는 문장은 지금 이 이야기를 다루는 글에 되풀이해 등장하지만, 이 숫자를 어느 기록에서 가져왔는지 밝힌 자료를 찾기 어렵다. 이 수치를 쓰는 유명한 온라인 에세이 한 편은 출처를 대는 대신 「만약 그런 일일 사망률이 사실이었다면」이라는 가정법을 달아 두었다.
03이 절의 근거자료 6
- 동시대 문서에 400이라는 숫자, 사망 언급, 무대, 고용된 악사, 붉은 신발, 「트로페아」라는 이름이 없다는 점: Rue89 Strasbourg, Clementz 인터뷰 — 「당대 문서고에는 어떤 사망자도 언급되지 않는다」 / 영어 위키피디아 "Dancing plague of 1518" — 사망을 기록한 사료가 확인되지 않는다는 서술. 사망이 전혀 없었다는 뜻으로는 쓰지 않았다
- 브란트 연대기가 7월 중순 규모를 약 50명으로 적는 점: DHIAlsace. 이 값은 행정문서가 아니라 동시대 행정관의 연대기에서 온다 — 표의 첫 칸에 출처를 함께 적고 「표 읽기」에 두 자료군이 함께 있음을 밝힌 이유다
- 400이라는 값이 임린 가문 연대기에서 나오고, 같은 자료를 4주째 200명 초과로 읽는 독해가 있다는 점: Lynneth Miller Renberg, "Divine Punishment or Disease? Medieval and Early Modern Approaches to the 1518 Strasbourg Dancing Plague", 『Dance Research』 35/2 (2017), doi:10.3366/drs.2017.0199의 임린 연대기 번역 / DHIAlsace·Rue89의 Clementz 독해. 같은 텍스트에 대한 학자 간 독해 차이로 표시했다
- 존 월러가 400을 쓸 때 「한 연대기 작가가 주장하기를」이라는 단서를 붙인 점: John Waller, "In a spin: the mysterious dancing epidemic of 1518", 『Endeavour』 (2008). 이 논문 본문에는 닿지 못했다. 월러가 규모를 「hundreds of people」로 서술한다는 점은 Graeme Murdock, 서평, 『German History』 (2009), doi:10.1093/gerhis/ghp009가 확인한다
- 대량 매장지·인골 증거의 상태: 이를 지목한 조사가 확인되지 않았다는 것이지 고고학적 부재가 증명된 것은 아니다. 고고학 조사의 범위도 제시되어 있지 않다. 본문을 「이 글이 찾지 못했다」로 적어 확인 실패의 주체를 문장 안에 남긴 이유다
- 「최성기에 하루 열다섯 명」의 출처를 밝힌 자료를 찾기 어렵다는 상태: 동시대 문서에 없고, 월러의 『Endeavour』(2008)와 『The Lancet』(2009) 두 편에도 없다. Miller Renberg (2017) 149쪽에 「하루 열다섯 명이 그대로 쓰러져 죽었다」는 표현이 나오지만 그 각주가 가리키는 사료는 확인하지 못했다. Public Domain Review의 에세이는 이 수치를 쓰되 출처를 대지 않고 「만약 그런 일일 사망률이 사실이었다면」이라는 가정법을 붙인다. 유통 빈도는 계량되지 않았고 다른 수치들과 근거 수준을 비교한 조사도 없어, 본문은 이 한 수치의 추적 상태만 적는다
04장면은 나중에 도착했다
그러면 그 장면들은 언제 왔는가. 도착 순서가 있다.
1520년대, 슈트라스부르 라틴어학교 교장 히에로니무스 게브빌러가 이 사건을 정숙과 절제의 결여에 대한 신의 징벌로 해석했다. 그는 특히 수치스럽고 불경한 춤을 제한하라고 요구했다. 사건에 도덕이 붙은 이른 종이다.
1530년대에 파라켈수스가 무도병에 관한 논고를 썼다. 그는 이것을 상상성·관능성·자연성의 세 갈래로 분류했고, 「성 비투스의 춤」을 의학 용어로 세운 인물로 평가된다. 그리고 그가 첫 무용수에 대해 쓴 문장은 이렇다. 속임수를 완벽하게 만들고 정말로 병처럼 보이게 하려고 그 여자는 뛰고 노래했으며, 그 모든 것이 남편에게는 몹시 거슬리는 일이었다.
이름 없던 여자에게 이름과 동기가 함께 생긴 순간이다. 그런데 그 이름 자체가 파라켈수스의 조어라는 지적이 있다. 「트로페아」는 그리스어에서 온 「돌게 하는 여자」라는 뜻이고, 2018년 슈트라스부르가 연 전시를 소개한 자료는 이 인물이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고, 현학적인 발명이라고 적는다. 도록 원문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고, 여기 옮긴 것은 그 전시를 다룬 보도와 인터뷰가 전한 범위다. 파라켈수스가 이 도시에 온 것은 1526년, 사건이 끝나고 여덟 해 뒤다. 그의 논고는 1530년대에 쓰였고 그가 죽고 스무 해쯤 지나 인쇄됐다.
1580년 무렵, 다니엘 슈페클린이 『콜렉타네아』를 썼다. 슈트라스부르의 축성 기사였고, 사건에서 예순두 해가 지난 뒤였다. 동시에 100명 이상이 춤을 추었다. 시가 곡물시장과 말시장에 무대를 세우고 길드 회관을 내주었다. 북과 피리 연주자를 고용하고, 삯을 주고 함께 춤춰 줄 사람들을 붙였다. 많은 이가 춤추다 죽었다. 자베른의 성소로 가는 순례가 있었고, 신발 위아래에 성유 발삼으로 십자가를 그리고 성수를 뿌렸다.
오늘 우리가 1518년이라고 부를 때 떠올리는 장면 — 무대와 악사와 다수의 죽음 — 은 이 한 사람에게서 온다. 이름과 동기는 파라켈수스에게서, 병명과 죽음의 결합은 골트마이어에게서 따로 온다. 세 종이가 각각 다른 것을 얹었다.
이 대목에서 앞의 처방을 다시 보면 방향이 정확히 반대다. 동시대 의사들이 치우라고 한 바로 그 두 악기를, 62년 뒤의 연대기는 시가 돈을 주고 불러들였다고 적는다.
슈페클린 자신도 자기가 적은 것을 다 믿지는 않았다. 그는 이 모든 일에 구걸을 노린 사기가 많이 섞여 있었다고 덧붙였다. 대중 서술에서 거의 언제나 빠지는 문장이다. 그리고 그의 원고는 1870년 포격으로 도서관과 함께 불탔다. 지금 읽을 수 있는 것은 1890년에 나온 단편 모음 편집본이다.
1636년, 골트마이어의 점성 연대기가 한 문장 안에서 두 가지를 동시에 도착시킨다. 연대기의 원본과 판본은 확인되지 않았고, 여기 옮긴 것은 영역 인용이다. 1518년에 사람들 사이에 성 비투스의 춤이라 불리는 주목할 만하고 끔찍한 병이 돌았고, 사람들이 광기 속에서 밤낮으로 춤추다 마침내 의식을 잃고 쓰러져 죽음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사건보다 118년 뒤다. 병명과 결말이 같은 문장에서 함께 왔다.
04이 절의 근거자료 11
- 1520년대 히에로니무스 게브빌러가 사건을 정숙과 절제의 결여에 대한 신의 징벌로 해석하고 수치스럽고 불경한 춤의 제한을 요구한 점: 2018년 전시 보도자료 / 교사용 자료집. Karl Stenzel 편(1926) 판본. 재인용 상태다. 접근하지 못한 초기 연대기가 남아 있어 「첫 종이」가 아니라 「이른 종이」로 적었다
- 파라켈수스의 무도병 삼분류(chorea imaginativa · lasciva · naturalis)와 「Chorea Sancti Viti」를 용어로 세운 평가: Vale & Cardoso (2015) — 「Paracelsus coined the term chorea Sancti Viti and recognized different forms of chorea (imaginativa, lasciva, and naturalis).」 / Lanska (2017). 파라켈수스 원저 본문은 열지 못했고 심사 문헌 두 편으로 이 항목을 받쳤다. Miller Renberg (2026)는 그가 1518년 사건에 대해서는 자연적 원인과 상상된 원인 둘을 들었다고 적는다 — 삼분류는 무도병 일반의 형태 구분이고 두 원인은 이 사건에 적용한 설명이다
- 첫 무용수가 남편을 골리려 병을 가장했다는 파라켈수스의 서술: Public Domain Review에 실린 Zilboorg 영역 재인용 / Hecker 영역본 「의사들」 절. 가장(malingering) 설명이 파라켈수스에게서 나온다는 점은 Lanska (2017)가 확인한다 — 「he instead suggested a psychogenic or malingered etiology」
- 「트로페아」가 파라켈수스의 조어이며 그리스어 tropaia에서 온 「돌게 하는 여자」라는 지적, 그리고 2018년 전시가 이 인물을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현학적 발명」으로 적었다는 서술: Rue89 Strasbourg의 Clementz 인터뷰 / 2018년 전시 보도자료 / 프랑스어 위키피디아 「Épidémie dansante de 1518」은 이 이름을 「매우 개연성 없음」으로 표기한다. 도록 원문은 확인되지 않아 본문에 경로를 밝혔다
- 파라켈수스가 1526년에 슈트라스부르에 온 점, 논고가 1530년대에 쓰이고 사후에 인쇄된 점: Rue89 인터뷰 / 전시 보도자료. 초판 연도가 1565년과 1567년으로 갈려 본문에서 연도를 특정하지 않고 「그가 죽고 스무 해쯤 지나」로 적었다
- 슈페클린이 사건 62년쯤 뒤에 『Collectanea』를 썼고, 동시에 100명 이상·곡물시장과 말시장의 무대·길드 회관 개방·북과 피리 연주자 고용·삯을 받고 함께 춤춘 사람들·많은 이가 죽었다는 서술·성유 발삼 십자가와 성수를 뿌린 신발이 모두 그에게서 나온 점: 교사용 자료집 / mythische-orte.eu, 「Tanzwut」 PDF에 실린 독일어 원문 조각
- 장면 목록의 귀속 분배: 무대·악사·다수의 죽음은 슈페클린, 이름과 동기는 파라켈수스, 병명과 죽음의 결합은 골트마이어에게서 온다. 「거의 전부 한 사람에게서 온다」는 포괄 범위를 항목별 귀속으로 바꾼 이유다
- 악사 고용 서술의 출처 계보는 아직 열려 있다. Miller Renberg (2026)는 1518년 대응을 「hiring musicians and then banning music」으로 적는다. 이 서술이 1518년 문서에서 온 것인지 슈페클린 계열을 받은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았고, 그에 따라 본문 4절의 대비가 달라질 수 있다
- 슈페클린 자신이 「이 모든 것에는 구걸을 노린 사기도 많이 섞여 있었다」고 덧붙인 점: 같은 자료. 가장과 사기가 이 현상의 구성 요소 가운데 하나라는 평가는 Lanska (2017) — 「component causes likely included psychogenic illness, malingering, and ritualized behaviors」
- 슈페클린의 원고가 1870년 포격으로 소실되어 현존하는 것이 1890년 단편 모음 편집본뿐인 점: 영어 위키피디아 "Daniel Specklin". 1890년 편집본 원문은 접근이 막혀 열지 못했고, 편자 표기가 자료마다 갈린다
- 1636년 골트마이어의 점성 연대기가 「성 비투스의 춤이라 불리는」 병명과 「죽음에 이르렀다」는 결말을 한 문장에 함께 적은 점: Public Domain Review에 실린 영역 인용. 연대기 원본과 판본은 확인하지 못했고 본문에도 그 상태를 적었다
05헤커의 목차
1832년 베를린에서 유스투스 헤커가 『무도광, 중세의 한 민중병』을 냈다. 벤저민 배빙턴의 영역본이 뒤따랐고, 그 번역본이 이 현상에 붙인 영어 이름은 dancing mania였다. 오늘 더 자주 쓰이는 dancing plague가 어디서 갈라져 나왔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은 것을 말해 주는 부분은 본문이 아니라 목차다.
1장은 독일과 네덜란드의 무도광이다. 성 요한의 춤과 성 비투스의 춤, 원인, 더 오래된 무도 역병들, 의사들, 그리고 쇠퇴와 종식. 2장은 이탈리아의 무도광, 곧 타란티즘이다. 3장은 아비시니아의 무도광, 티그레티에다. 그리고 4장의 제목은 「공감」이다.
라인란트의 춤과 남부 이탈리아의 거미 물림과 에티오피아의 빙의가 한 권에, 한 병명 아래 묶였다. 마지막 장이 그 묶음을 정당화한다. 헤커는 오늘날 아비시니아인의 상태가 미신에 관한 한 중세 유럽인의 상태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썼다. 세 대륙의 서로 다른 몸짓이 하나의 질병으로 합쳐지는 데 필요했던 것은 병원체가 아니라 그 문장 하나였다.
라인란트
성 요한 춤 · 성 비투스 춤
남부 이탈리아
타란티즘
에티오피아
티그레티에
도식 02헤커가 한 권에 묶은 세 지역
1832년 헤커의 책은 이 셋을 한 범주 안에 놓았다.
만든 것자료: J. F. C. Hecker 『Die Tanzwuth, eine Volkskrankheit im Mittelalter』 (1832) 목차 구조. 묶였다는 사실만 표시했고 이들이 같은 병이었는지는 판정하지 않는다. 세 지역 사이에 이동이나 인과가 있었다는 뜻이 되지 않도록 화살표를 쓰지 않았다.
여기까지는 놀랍지 않을 수도 있다. 19세기 유럽의 학문이 무엇을 했는지는 이제 익숙한 이야기다. 놀라운 것은 다음이다.
그 책에 1518년이 없다.
헤커의 「성 비투스의 춤」 절이 슈트라스부르를 다루기는 한다. 그런데 그가 적은 연도는 1418년이다. 그리고 오늘날 1518년의 이야기로 유통되는 시 당국의 대응 서사 — 환자를 조로 나누고 책임 감독관을 붙여, 도보와 마차로 자베른과 로테슈타인의 성 비투스 예배당으로 이송했다는 대목 — 을 헤커는 1418년의 일로 서술한다.
확인되는 것은 여기까지다. 이 범주를 만든 책 안에 1518년이 없다. 그 뒤 1518년이 언제 누구를 통해 이 범주의 대표 사례가 되었는지, 그 연결 고리는 이 글이 밝히지 못했다.
그래도 순서 하나는 남는다. 무도광이라는 범주 자체가 19세기의 구성물이라는 지적은 이 분야에서 이미 여러 차례 나왔다. 이름과 범주가 먼저 있었고, 사건은 나중에 그 이름 아래로 들어왔다.
문서고의 넉 장
게브빌러 — 신의 징벌
파라켈수스 — 이름과 동기
슈페클린 — 무대와 죽음
골트마이어 — 병명과 결말
헤커 — 「무도광」이라는 범주
도시가 자기 신화를 해체한 전시
도식 01종이가 도착한 순서
1518년의 종이에서 각 기록까지의 거리다. 위 축의 점은 실제 시간 간격, 아래 목록은 기록이 도착한 순서를 보여 준다.
만든 것자료: 슈트라스부르 시립문서고 1518년 문서 · Stenzel 편 게브빌러 연대기 (1926) · Paracelsus 무도병 논고 (1530년대) · Specklin 『Collectanea』 (1580년경) · Goldtmayer 점성 연대기 (1636) · Hecker 『Die Tanzwuth』 (1832) · 슈트라스부르 박물관 2018년 전시 자료. 실제 연도 위치와 읽기 목록을 분리했고, 각 기록이 무엇을 얹었는지만 적었으며 그 기록이 참인지는 판정하지 않는다.
05이 절의 근거자료 7
- J. F. C. Hecker, 『Die Tanzwuth, eine Volkskrankheit im Mittelalter』(베를린, 1832)와 Benjamin Guy Babington 영역본 『The Epidemics of the Middle Ages』(Der Schwarze Tod · Die Tanzwuth · Der englische Schweiss 세 편의 번역): Project Gutenberg 판을 미러한 루이지애나주립대 로스쿨 페이지에서 목차와 본문을 직접 확인했다
- 영어 이름의 계보: 배빙턴 번역본이 이 현상에 붙인 이름은 「The Dancing Mania」 계열이다. 오늘 더 자주 쓰이는 dancing plague가 그 절 제목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어휘사 주장은 확인되지 않아 쓰지 않았다
- 목차 구성 — 1장 독일과 네덜란드의 무도광(성 요한 춤·성 비투스 춤·원인·더 오래된 무도 역병·의사들·쇠퇴와 종식), 2장 이탈리아의 타란티즘, 3장 아비시니아의 티그레티에, 4장 「Sympathy」: 같은 자료의 목차 페이지
- 「오늘날 아비시니아인의 상태가 미신에 관한 한 중세 유럽인의 상태를 비추는 거울이다」: 같은 자료, 티그레티에 절
- 헤커의 「성 비투스의 춤」 절이 슈트라스부르를 1418년 사건으로 적고, 환자를 조로 나누어 책임 감독관을 붙이고 도보와 마차로 자베른과 로테슈타인의 예배당으로 이송했다는 대응 서사도 1418년의 일로 서술하는 점: 같은 자료의 해당 절을 직접 열어 확인했다. 그 절에 등장하는 연도는 1418·303·836뿐이고 붉은 신발은 없다. 학술 색인에서 이 본문을 교차 확인할 수는 없었고, 5절 전체의 하중이 이 항목에 걸려 있다
- 무도광이라는 범주 자체가 19세기의 구성물이라는 지적: Kélina Gotman, 『Choreomania: Dance and Disorder』 (Oxford University Press, 2017), doi:10.1093/oso/9780190840419.001.0001 — 이 개념이 식민지 의학·민족지 회로를 통해 퍼졌고 「fantasies of instability—and of the Oriental other—haunted scientific modernity」 / Gregor Rohmann, "The Invention of Dancing Mania", 『The Medieval History Journal』 12/1 (2009), doi:10.1177/097194580901200102 / Kathryn Dickason, "Decadance in the Late Middle Ages: The Case of Choreomania" (2018), doi:10.1017/9781787440784.010
- 1518년이 이 범주의 대표 사례가 된 경로: 언제 누구를 통해 그렇게 됐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확인된 사실과 개념사적 해석의 층위를 나누기 위해 본문을 「확인되는 것은 여기까지다」로 끊었다
06설명이 세 번 바뀌는 동안
원인에 대한 대답은 지난 백 년 동안 세 번 자리를 옮겼다. 셋이 차례로 앞의 것을 밀어내고 끝난 것은 아니다. 지금도 나란히 남아 있고, 세 번이라고 세는 것은 이 글이 고른 정리다.
첫 번째는 물질이었다. 1952년 에우게네 백만이 호밀에 기생하는 맥각의 알칼로이드를 지목했고, 그 성분이 LSD와 구조적으로 가깝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 설명은 오래 사랑받았다. 지금은 설명력을 많이 잃었다. 월러가 든 반박 가운데 가장 강한 것은 화학이 아니라 지리다. 오염된 곡물이 원인이라면 발병은 곡물권을 따라 퍼졌어야 한다. 그런데 실제 분포는 라인강과 모젤강을 따랐다. 물길로 이어져 있지만 기후도 작물도 서로 다른 지역들이다. 강을 따라 움직인 것은 곰팡이가 아니었다고 그는 본다.
두 번째는 심리였다. 월러의 집단심인성질환 설명은 세 단으로 되어 있다. 극심한 심리적 고통이 사람을 변성 의식으로 넘어가기 쉽게 만들고, 초자연적 세계관이 그 넘어감을 일어날 수 있는 일로 만들며, 성 비투스 신화가 넘어간 다음에 무엇을 할지의 대본을 준다. 그가 모은 1517년과 1518년 알자스의 조건은 구체적이다. 슈트라스부르 사람들이 그때까지 겪어 본 적 없는 빵값, 새해에 닥친 기근, 넘쳐 나던 병원과 보호소, 삼백 명이 들어찬 고아원, 새 환자로 가득한 두창 병원, 늘어난 나병 환자. 한 연대기 작가는 그해에 짧게 「나쁜 해」라는 이름을 붙였다.
중요한 것은 월러의 주장이 「그들이 히스테리였다」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의 논지는 고통이 그 시대가 쥐여 준 문법으로 표현된다는 쪽에 가깝다. 증상의 목록 자체가 시대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그 설명을 향한 반문이다.
1994년 로버트 바솔로뮤는 집단심인성질환이라는 진단이 여성의 정상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반영하는 모호한 범주 위에 서 있다고 지적했다. 이 사건들에 참여한 사람들이 병자가 아니라, 서구에서 훈련받은 조사자들의 그것과는 크게 다른 행위 규범과 세계관과 정치적 의제를 가진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사람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20세기 중반의 의학사가들을 이름으로 지목하기도 했다. 조지 로젠과 헨리 지거리스트가 원사료를 끝까지 확인하지 않고 「여성이 취약하다」는 통념에 맞는 대목만 골라 인용했다는 것이다. 중세 연대기들을 다시 옮겨 대조하면 여성이 참가자 가운데 더 많았다고 적힌 곳은 없다.
2009년 그레고르 로만은 더 직접적으로 썼다. 월러가 이 현상을 심인성 질환으로 분석하지만 그것은 사실 낡은 개념에 붙인 새 이름표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의 단행본 부제가 논지 전부를 말한다. 한 중세 질병 개념의 의미사. 질병사가 아니라 개념사다.
2017년 리네스 밀러 렌버그는 질문을 아예 옮겼다. 슈트라스부르 사건에 대한 논의는 전통적으로 원인에 집중하는데, 그것은 매혹적인 질문이지만 1518년의 기록들이 드러내는 이념의 변화를 가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덧붙인 한 줄이 이 회차의 문을 정확히 연다. 중세 내내 계속되는 춤 사건은 대체로 역병이 아니라 저주라고 불렸다.
바솔로뮤의 1994년은 월러의 2008년보다 앞선다. 월러가 그 비판을 읽었는지를 이 글은 확인하지 못했다. 다만 비판이 나온 뒤에도 소급 설명이 자리를 지켰다는 것은 남는다. 널리 퍼진 설명이 곧 연구자들이 겨누는 설명이라는 비대칭이 여기서 생긴다. 그리고 세 번의 이동을 관통하는 물음은 하나다. 누가 이 몸에 이름을 붙일 권한을 갖는가.
06이 절의 근거자료 14
- 세 번의 이동이라는 정리: 세 설명이 실재하고 이 순서로 등장한 것은 맞으나, 어느 심사 문헌도 이것을 계승 관계로 서술하지 않는다. Lanska (2017)는 같은 설명들을 병렬 목록으로 놓고 「무도광에는 단일 원인이 없었고 구성 원인에는 심인성 질환·가장·의례화된 행동이 함께 들어갔을 것」이라고 닫는다. Katarzyna Prochwicz & Artur Sobczyk, "Dancing manias. Between culture and medicine" (2011), PMID 21714215는 여섯 갈래를 나란히 놓는다. 본문에 이 정리가 이 글의 것임을 밝힌 이유다
- 맥각 중독설의 주창자가 Eugène Louis Backman, 『Religious Dances in the Christian Church and in Popular Medicine』(1952)이라는 점: John Waller의 논문들이 인용하는 계보. 맥각설이 제기된 설명 가운데 하나라는 점은 Lanska (2017)가 확인한다. 최초 주창자 귀속은 원저로 확인되지 않았다
- 「맥각에 든 화학물질은 며칠씩 이어지는 조율된 움직임을 허용하지 않는다」: Waller, 『Endeavour』 (2008)
- 「그렇게 많은 사람이 그 향정신성 물질에 같은 방식으로 반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와 「거의 모든 발병이 라인강과 모젤강을 따라 일어났는데, 이 지역들은 물로 이어져 있지만 기후도 작물도 상당히 다르다」: Waller, "A forgotten plague: making sense of dancing mania", 『The Lancet』 373 (2009). 맥각이 혈관을 수축시켜 며칠씩 춤출 수 없다는 논거는 대중 해설이 월러에게 귀속시키지만 이 두 논문 본문에는 없어 쓰지 않았다
- 맥각설의 학계 상태와 지리 논증의 지위: 월러의 반론은 맥각 단일원인설의 설명력을 약화하지만, 한 계열의 반론만으로 학계 전체의 폐기 정도를 계량할 수 없다. 그래서 「설명력을 많이 잃었다」로 적고 지리 논증의 결론을 월러의 판단으로 귀속시켰다. 라인·모젤 분포라는 같은 사실이 물질적 설명을 다시 주장하는 쪽에서도 근거로 쓰인다
- 집단심인성질환 설명의 세 단계: Waller, 『Endeavour』 (2008) · 『The Lancet』 (2009) · "Dancing plagues and mass hysteria", 『The Psychologist』 (2009). 같은 구조를 쪽수와 함께 재서술한 심사 지면: Murdock, 서평, 『German History』 (2009) — 「'심리적 고통'에 대한 반응으로 '깊은 트랜스 상태'에서」(p.77), 「성 비투스에게 저주받았다고 믿게 된 사람들」(p.92), 「'성 비투스의 악의에 취약하다'고 느끼게 되면서」(p.100)
- 1516~17년 슈트라스부르의 빵값, 새해의 기근, 넘쳐 난 병원과 보호소, 삼백 명이 들어찬 고아원, 새 환자로 가득한 두창 병원, 늘어난 나병 환자, 그리고 한 연대기가 그해에 붙인 「나쁜 해」라는 이름: Waller, 『Endeavour』 (2008). 배경의 성격은 Murdock (2009)이 「일련의 농민 봉기, 흉작, 가혹한 질병」과 「슈트라스부르 인구의 참혹한 상태」(p.71)로 확인한다. 곡물 가격의 구체적 수치는 확인하지 못해 쓰지 않았고, 배경 압력이지 입증된 원인이 아니라는 범위를 지켰다. 고아원 삼백 명 같은 개별 수치는 여전히 월러 단일 출처다
- 고통이 시대가 제공한 문법으로 표현되며 심인성 증상의 목록 자체가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달라진다는 논지: Waller가 에드워드 쇼터의 「증상 풀」 개념을 끌어와 단서를 다는 대목, 위 세 편 / Murdock (2009)이 「cultural conventions can determine the manner in which pathological anxiety is expressed」(p.213)로 요약한다
- 「진단은 여성의 정상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반영하는 주관적이고 모호한 범주 위에 서 있다」와 「이 사건들은 서구에서 훈련받은 조사자들의 그것과 크게 다른 행위 규범과 세계관과 정치적 의제를 지닌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사람들을 포함할 수 있다」: Robert E. Bartholomew, "Tarantism, dancing mania and demonopathy: the anthro-political aspects of 'mass psychogenic illness'", 『Psychological Medicine』 24 (1994), doi:10.1017/s0033291700027288. 두 인용 모두 초록에서 확인했다
- 선행 역사가들의 선별 인용과 성별 분포: Robert E. Bartholomew, "Dancing with Myths: The Misogynist Construction of Dancing Mania", 『Feminism & Psychology』 8(2), 1998, doi:10.1177/095935359800800204 — 「the selective use of period quotations by medical historians George Rosen and Henry Sigerist… Contrary to popular psychiatric portrayals, females were not overrepresented among participants.」 초록의 표현은 참여 구성에 대한 결론이고, 본문의 「더 많았다고 적힌 곳은 없다」는 그보다 좁게 텍스트의 상태만 말한다
- 「미국 의학사가 존 월러의 아주 최근 개관조차 무도광을 심인성 질환으로 분석하는데, 그것은 사실 낡은 개념에 붙인 새 이름표일 뿐이다」: Rohmann (2009). 이 축자 인용은 본문에서 확인하지 못했고, 초록의 「연구자들은 이것을 불변의 의학 증후군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대신 질병의 역사성을 의미망으로 검토해야 한다」가 같은 방향이다
- 로만의 단행본 『Tanzwut』(V&R, 2013)의 부제가 한 중세 질병 개념의 의미사라는 점: 출판사 소개와 H-Soz-Kult 서평. 본문은 열지 못했다
- 「슈트라스부르 무도 유행에 대한 역사적 논의는 전통적으로 원인에 집중하는데, 그것은 매혹적인 질문이지만 1518년 사건의 서술들이 드러내는 이념적 변화를 가린다」와 「중세 내내 계속되는 춤 사건은 대체로 역병이 아니라 저주라고 불렸다」: Miller Renberg (2017). 축자 형태는 확인되지 않았고, 주제 수준의 지지는 같은 논문 초록의 「an event trapped between medieval and modern ideologies」와 Miller Renberg (2026)의 「treated as religious crises, divine punishment, or demonic afflictions」가 제공한다
- 바솔로뮤의 1994년과 월러의 2008년 사이의 시간 관계: 두 발표 연도에서 선후는 성립한다. 그러나 시간 순서는 인지 여부를 증명하지 않아 「알고도 택했다」는 추론을 쓰지 않았다. 여러 설명의 수용도와 비판 강도를 비교한 조사도 없어 최상급을 쓰지 않았다
07그래도 발은 아팠다
이 지점에서 미끄러지기 쉬운 곳이 있다. 다 지어낸 이야기였다고 말해 버리는 것이다.
로만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 범주가 19세기의 구성물이라고 강하게 쓴 바로 그 글에서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고통받은 사람들의 역사적 실재를 보여주는 문서고 증거가 있다, 1518년 슈트라스부르의 파이츠탄츠가 그 사례다.
이름이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은 그 여름의 발이 아프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아이의 부모를 불러 심문한 기록이 남아 있고, 도시가 며칠씩 사람들을 붙잡아 두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끝나가고 있다고 적은 지 열이레 만에 다시 나타났다고 적은 기록이 남아 있다. 그 종이들은 구경거리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감당해야 할 일을 기록한 것이다.
2018년, 도시는 500주년 전시를 열었다. 대성당 옆 노트르담 미술관에서 넉 달 동안 이어졌고, 일곱 섹션 가운데 마지막 둘의 제목은 「후대의 재해석과 왜곡」과 「현대의 유사 집단현상」이었다. 도시가 자기 500주년 전시의 마지막 두 방을 자기 신화를 해체하는 데 썼다는 뜻이다.
이야기는 그 뒤로도 계속 다시 만들어진다. 2020년 봉쇄 기간에 조너선 글레이저가 십 분짜리 영상을 만들었다. 전담 안무가 없이 무용수 아홉 명이 각자 자기 공간에서 춤춘다. 500년 전 그 도시가 환자들을 광장이 아니라 실내에 붙잡아 두었다고 읽는 최근 해석이 있고, 이 작업은 그 해석과 겹쳐 보인다. 겹쳐 보인다는 것은 지금 이 글이 그렇게 읽었다는 뜻이지, 만든 사람이 겨냥한 것은 아니다. 2026년 2월에는 새 다큐멘터리가 공개됐다. 역사학자가 도서관 열람실에서 브란트와 파라켈수스의 책을 펼치는 장면이 들어간다.
1518년 7월 25일의 종이에는 북과 피리를 치우라고 적혀 있다. 우리가 아는 그 여름에는 북과 피리가 울린다. 두 문장 사이에는 62년이 있다.
07이 절의 근거자료 6
- 「그러나 우리에게는 고통받은 사람들의 역사적 실재를 보여주는 문서고 증거가 있다, 1518년 슈트라스부르의 파이츠탄츠가 그 사례다」: Rohmann (2009). 축자 인용은 미확인이나 초록의 「dancing mania appears to have been a form of insanity, indeed, but one constructed through religious narratives」가 같은 구조를 확인한다
- 에히터나흐 뜀뛰기 행렬이 성령강림 화요일에 열리고 문헌 기록이 1100년까지 올라가며, 교회 당국의 여러 차례 금지 시도가 실패했고, 2010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등재됐으며 최근 규모가 약 1만 3천 명에 이르는 점: UNESCO, 「Hopping procession of Echternach」(2010 등재). 본문의 「수천에서 만 명 넘는」은 이 값을 포함한다. 1518년의 연속 전통으로 쓰지 않았다
- 2018년 500주년 전시 《1518, la fièvre de la danse》가 무제 드 뢰브르 노트르담에서 2018년 10월 20일부터 2019년 2월 24일까지 열렸고, 일곱 섹션 가운데 마지막 둘이 「후대의 재해석과 왜곡」과 「현대의 유사 집단현상」이었던 점: 슈트라스부르 박물관 출판 페이지 / 전시 보도자료 / 교사용 자료집. 일곱 중 둘이므로 본문을 「마지막 두 방」으로 적었다
- 조너선 글레이저 〈Strasbourg 1518〉이 2020년 7월 BBC Two에서 방영된 10분 영상이며, 전담 안무가 없이 무용수 아홉 명이 봉쇄 중 각자의 공간에서 촬영한 점: Artangel 프로젝트 페이지. 이 작품이 학술 지면에서 다뤄진 점은 Candice Salyers, "Epilogue: Dancing the Spaces Between" (2021), University of Southern Mississippi — 2020년 봄에 같은 제목의 두 작품이 공개됐고 둘 다 팬데믹을 1518년의 반향에서 마주한다는 서술
- 실내 격리 해석의 지위: DHIAlsace의 사료 비판이 공개 무대보다 실내 격리를 강조한다. 다만 최근 연구가 이 하나로 모이지는 않는다 — Zmick (2026)은 성소 순례를, Miller Renberg (2026)는 병원 수용을 대응의 중심에 둔다. 본문을 「최근 해석이 있고」로 열고, 글레이저 영상과의 공명을 필자의 읽기로 한정한 이유다. 슈페클린 계열의 무대 서술과 대립하는 독해임은 본문이 이미 밝히고 있다
- 2026년 2월 공개된 다큐멘터리 《Danse mortelle, l'étrange cas de Strasbourg 1518》(감독 Bastien Gens)에 역사학자가 BNU 유산 열람실에서 브란트와 파라켈수스의 저작을 놓고 촬영한 장면이 포함된 점: 슈트라스부르 국립대학도서관(BNU) 공식 소식
생각해볼 질문
당신이 겪은 힘든 일에 누군가 이름을 붙여 준 적이 있는가. 그 이름은 당신을 도왔는가, 아니면 당신 대신 이야기를 끝내 버렸는가.
오늘의 한 문장
이름은 사건을 설명하기 전에, 어떤 사건이 남을지부터 고른다.
더 보고 싶다면
DHIAlsace, 「Danse de Saint-Guy」 (Élisabeth Clementz)
슈트라스부르 국립대학도서관이 운영하는 알자스 제도사 사전의 항목이다. 1518년 문서의 독일어 원문 인용이 청구기호와 함께 실려 있어, 이 글이 선 바닥을 직접 볼 수 있다.
John Waller, 『A Time to Dance, a Time to Die』
이 사건을 오늘날의 유명한 이야기로 만든 책이다. 가장 널리 읽힌 설명이자 가장 자주 반박되는 설명이라, 두 가지를 한꺼번에 볼 수 있다.
조너선 글레이저, 〈Strasbourg 1518〉 (2020, 10분)
봉쇄된 방 안에서 혼자 추는 춤으로 1518년을 다시 만든 십 분짜리 영상이다. 역사의 재현이 아니라 응답에 가깝다.
익숙한 결, 뜻밖의 결, 남겨진 결.